주말에 친구랑 성북동에 있는 상허 이태준 집터를 가보았다.
이태준은 <구인회>에 가담하여 활동하고
월북을 했고, 분단과 이데올로기로 인해 제대로 조명이 되지 못한 작가라고 한다.
성북동 쌍다리를 지나 오른쪽으로 틀어 조금 올라가면
상허 이태준 가옥이라고 돼 있는 집이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문인이라 그런지 여대생들도 많이 방문했다.
입구에 상허 이태준에 대한 설명에는 이태준을 "순수문학" 작가라고 소개돼 있는데
아쉬운 점이었다.
이태준은 구인회를 활동할 만큼, 순수문학만을 하지는 않았는데...
순수문학 단편작가로만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 무척 아쉽고, 앞으로 재조명이 되어야 할 부분이라 느껴졌다.
이태준을 기리며 생전에 이태준이 사용하던 물품이나 문학적인 유품 등을 진열해 놓고
일반인이 그를 회고하고 재조명할 수 있는 그런 집.
유럽의 작가의 집들처럼 돼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우리의 기대는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다.
이곳에서 생활한 집터라는 사실만 남았을 뿐, 사실은 찻집이었다.
곳곳에 방문한 사람들이 음식을 먹거나 차를 마시거나 하는
상업적인 공간이었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정말 많아 움직이기가 번거로울 정도였다.
음식을 시키지 않으면 앉을 자리도 없고, 돌아보기도 민망하였다. 어느 곳에도
이태준 문학에 대한 것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먹고 마시고 하는 자리들 뿐...
손님들(그렇다, 방문객이 아닌 손님들)이 많아,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지만,
집만 덩그마니 이태준의 가옥일 뿐, 그를 회고할 수 있는 부분은 몹시 아쉬웠다.
그래서 집구경이라도 하자고 뒤안으로 돌아가보았다. 저 위의
작은 봉창 같은 것이 정다웠다.
6년 전만 해도 북촌도 나름 예전 모습 그대로 공간이 유지된 집들과 골목이 많았는데,
지금은 중국사람들까지 사람들이 많이 찾자, 너도 나도 일반가옥들을 찻집으로 개조하고
높은 전망을 확보한 곳은 아예
집을 레스토랑이나 찻집으로 만들어 손님들을 이끌고 있었다.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북촌도 그렇고, 과거의 공간들이 너무 상업적으로 변해 가는 게 아쉽다.
우리처럼 이태준에 대한 발자취를 기대하고 갔던
여대생들이 그날 많았는데 그녀들도 가옥에 들어가서 시큰둥한 표정으로 금방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남자친구 생기면 차 마시러 와."
하는 찻집으로 정도?? 각인되는 모양이었다.
위의 덕수수퍼마켓은 이태준 가옥을 내려오며 찍은 것.
'성북동 쌍다리'를 언급하는 간판들이 많았는데
저게 쌍다리 중 하나인지는 모르겠다. 다리 위에 위태롭게, 지어진 정말 독특한 구조물이었다.
옛날 향수를 자극하게 하는 수퍼...
예전스런 모습이 남아 있는 독특한 마을이었다.
좀 내려오면 성북동 쌍다리 근처, '40년 정통 숯불구이 백반 집'에서 점저를 먹었는데,
"가격에 비해, 또는 외관에 비해... 또 오고 싶진 않다."
고 친구가 말했다. 이래저래 조금 기가 빠지는 주말이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문인의 가옥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후손인 주인이 관리하며, 과거의 모습을 지켜가고 여러 사람들이 오게 하는 노력만도 어디일까.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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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허 이태준에 대한 더욱 자세한 자료 [다음카페 책동네]
http://cafe.daum.net/bookjoy/Kiqz/234?docid=4111219301&q=%BB%F3%C7%E3%C0%CC%C5%C2%C1%D8&re=1
※아래는 카페에서 일부 펌했습니다.
호 상허(尙虛)·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 강원도 철원(鐵原)에서 출생하였다. 휘문고보를 나와 일본 조치[上智]대학에 수학하였으며, 《시대일보(時代日報)》에 《오몽녀(五夢女)》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였고, 이후 이화여전 강사,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학예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가마귀》 《달밤》 《복덕방》 등의 단편소설은 인물과 성격의 차분한 내관적(內觀的) 묘사로 토착적인 생활을 부각시켜, 완결된 구성법과 함께 한국현대 소설의 기법적인 바탕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작중 인물들은 회의적·감상적·패배적 성격으로 부각되어 작품 전체가 허무와 서정에 깊이 침윤되었지만, 때로는 그 속에서 현실과 밀착된 시대정신에의 추구를 지향하기도 했다.
《문장(文章)》지를 주관하다가 8·15광복 직전 철원에서 칩거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포섭되어 활약하다가 월북하였다. 그의 단편 《해방전후(解放前後)》(1946)에서 이러한 문학적 변모를 확인할 수 있다. 작품에는 앞에 든 것 외에 소설집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딸 삼형제》 《사상(思想)》 《해방전후》 등이 있으며, 문장론《문장강화(文章講話)》가 있다.
이태준 선생은 우리나라 작가중 가장 많은 연구대상이며 이태준을 연구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사람이 가장많은 작가입니다. 또한 거의 유일하게 그의 호를 딴 상허학회라는 교수들 중심의 모임이 운영되고있을만큼 우리 문학사에 토대가 되는 사람입니다.
아래문학비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에 있습니다.
이 문학비가 세워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상허이태준 선생의 흉상인데요 이 흉상의 몸 반쪽이 없는 것은 아직 우리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더불어 이태준 선생에 대한 완전한 생애를 조명하지 못한 것을 상징적
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고 합니다.(작가회의 민영 시인님의 말 - 문학비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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