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가고나면 이제 서른다섯, 나이를 재는 저울이 있다면 이제 서른에서 마흔의 정 중간이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내년이 지난다면 이제 저울의 눈금은 마흔에 더 가까워질 테지. 그러다 욕조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반쯤 서린 거울을 올려다보며 창창했던 자신의 앞날도 왠지 김이 서린 느낌이었다...
요즘 여성들의 일상에 관한 내밀한 수다
_지은이 소설집 『미네르바에서 라떼』책 리뷰
안젤라는 어느 새 서른 넷이 되어 있다. 예전엔 충만함으로 가득했던 세계 여행도, 일에서 성공도, 자신의 한참인 재능도 삶을 채워주기엔 뭔가 부족함을 느낀다.
안젤라에게 사랑의 경험은 사실 외모에 비해 아주 빈약했다. 사랑의 경험을 떠올려 보자면 딱히 떠오르는 얼굴도 없었다.
안젤라가 겨우 떠올릴 수 있는 사랑이래 봐야 대학 때 동기와 잠깐 풋사랑의 기억이 있을 뿐. 그마저도 그리 추억할 만한 것은 못 된다.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제니(순애)마저 결혼하여 귀여운 아이를 낳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것도 안젤라에게는 배신감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은 서로의 본명 필남(안젤라의 본명), 순애(제니의 본명)가 맘에 들지 않아 서로에게 이국적인 이름까지 지어 부르던 가장 친한 사이였는데도 말이다.
제니의 결혼은 안젤라에게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제니는 평소 태어난 것 자체가 고(苦)라면서 불가적 사상에 심취했었다.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하기에 힘든 요즘 세상에 자식을 낳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이라고 흥분하며 말했던 제니가 올해 자식까지 낳았을 때 안젤라가 굳이 묻지 않았는데도 제니는 말했다.
“인간으로 태어난 도리인거지.”
독신으로 살 것 같은 제니마저 결혼을 해버리자 안젤라의 상실감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형제들도 결혼을 하고 남동생이나 올케와도 별로 사이가 가깝지 않아, 안젤라의 주위엔 이제 아무도 없는 것 같다는 쓸쓸함만이 묻어나올 뿐이다.
삼십 대 미혼 여성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만한 안젤라의 상황...
마침내 안젤라는 제니가 소개해주겠다는 남자를 만나기로 한다. 결혼을 전제로 한 소개팅이라면 모든 소개팅이 그렇듯이 안젤라에게도 신경이 많이 쓰인다. 옷은 어떻게 입을까, 어디서 만날까....
안젤라는 간만에 설렘, 기대, 호기심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이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소개팅 자리인 레스토랑에 도착하는 안젤라, 모든 소개팅 상황에서 나올 법한 매너리즘에 빠진 장면이면서도 동시에 드라마틱한 소개팅 순간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지은이 소설집 『미네르바에서 라떼』
『아내의 세계여행』(참조 알라딘 바로가기)에 이은 지은이의 두 번째 소설 『미네르바에서 라떼』(참조 예스24 바로가기)는 작가 자아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인상을 주면서 장르가 다양한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보다는 좀 더 도시적이고 모던한 작품들로 꾸며져 있다. 이번 작품집은 고독한 도시인들의 복잡한 내면의 심리에 치우친 경향의 작품들이 많다. 물론 「조선침뜸연구소」같은 다소 목적 문학의 분위기가 엿보이는 작품도 있고, 표제작인「미네르바에서 라떼」처럼 90년대 말 대학을 다녔던 대학생들의 어설프고 향수 어린 로맨스 분위기의 작품도 있고 「특별한 사람」과 같은 판타지적 성향 작품도 있지만.
이번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여성으로서 사회적 지위나 가정에서 역할 문제 등을 첫 번째 소설에서처럼 전투적이진 않지만 고단하고 은근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에게 환경이 나아졌다지만 엄마이면서 동시에 아내이며 직장생활까지 해야 하는 여성들의 고민은 여전하다. 「남편이 수상해」「비탈리, 샤콘느」 등 이런 주제를 가지고 깊이 천착하는 작가의식은 최근 패미니즘 경향의 새로운 해석으로까지 읽혀진다.
『미네르바에서 라떼』는 진지한 주인공들, 고단한 일상, 삶에 지친 고독한 도시인들의 단면들을 다각도로 보여주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재미가 있다. 그것은 작가 특유의 유머와 재치, 그리고 고단하고 척박한 일상들에서도 발견하려 애쓰는 새로운 세계와 인생의 긍정적인 면을 놓지 않으려는 여유의 정신 때문일 것이다.
화려하지도 않고 평범한 소시민들의 일상을 보여주면서도 세련되며, 읽고나면 충만한 느낌이 드는 근래에 읽은 책들 가운데 괜찮은 단편소설집이라 여겨졌다. 문학적 이슈와 시류에 물들지 않는 꿋꿋한 문학 본래의 향기가 느껴지는 책이다. 지은이 작가의 다름 앨범은 어떤 색깔일까, 조금 궁금해진다. (예스24/알라딘/인터파크 등 도서 참고. 인용문들은 책 본문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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